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훙치허 전투 (문단 편집) == 전개 == > 이 전투는 [[피델 카스트로]]가 몬카다 병영을 공격한 전설적인 전투보다 규모면에서나, 그 비중에서나 훨씬 의미가 큰 승리였다. >--------- > 김정일 코드 p.42 위의 인용문은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유명한 역사학자인 [[브루스 커밍스]]가 내린 평가다. 일본은 1939년 8월 관동군 6개 연대와 만주군과 경찰병력 2만 명을 동원하여 김일성과 최현이 지휘하는 게릴라 부대를 주요 목표로 6개월간의 진압작전에 돌입했다. 당시 김일성이 이끄는 부대를 토벌하고자 했던 마에다 다케시는 조선인이 다수 포함된 다른 특별 경찰대를 이끌고 1940년 초 몇 달 동안 김일성의 유격대를 추격했다. “김일성의 목은 내가 밴다”고 외치고 다녔던 마에다는 “김일성 부대가 허룽현 훙치허의 일본인 목재소를 습격하여 쌀을 탈취해갔다.”는 신고를 받고 경찰 및 군부대를 출동시켰다. 김일성 부대는 매복해 있다가 반격하기로 결정하고 마에다 부대가 접근해오자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김일성의 유격대가 마에다 부대와의 교전이 있었던 것은 1940년 3월 13일이었다. 어디까지나 마에다 부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마에다 부대는 첫 교전 이후부터 거의 2주 동안 김일성을 뒤쫓았다. 그러던 1940년 3월 25일 김일성 부대가 만든 덫에 빠졌다. 여기서 김일성은 250명의 유격대로 150(혹은 200)명의 일본군 부대와 싸워 승리했다. 당시 훙치허에서 치른 전투에서 김일성의 뻥이 섞인 주장대로라면 유격대는 일본군 70~140명을 사살했고 약 30명 정도의 일본군을 포로로 붙잡았다. 김일성의 유격대는 일본군 토벌대측의 경기관총 5정, 소총 100여 정, 탄알 1만여 발, 무전기 1대를 노획했다. 다만 유격대쪽의 사상자가 얼마나 나왔는지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어쨌든 김일성이 이끄는 부대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참이던 기간에 일본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 김일성을 연구한 서대숙 교수는 동북항일연군과 그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김일성의 부대는 1937년부터 1940년까지의 작전에서 가장 많을 때에 중국인과 한인을 합쳐 거의 300명에 이르기도 했으나 어떤 때에는 50명 이하의 인원으로 작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의 작전의 요체는 수많은 작은 단과지대로 부대를 나누고, 깊은 산림과 접근이 곤란한 지역을 통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데에 있었다. >---- >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p.3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